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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놀이가 되다 /인생에 필요한 영감

찬스볼이 찬스볼이 아니다 (현정화 인터뷰)

지고는 못사는 성미다. 초등학교 3학년, 운명처럼 만난 2.7g짜리 탁구공이 그 지독한 승부욕에 불을 지폈다. 바지 허리춤 배배 돌아갈 만큼 마른 체구였지만 대신 '깡'이 있었다. 6학년 때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중3, 영국 세계주니어오픈에서 4관왕을 거머쥐면서 '천재' 소릴 들었다. 86년 아시안게임 여자복식 동메달, 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복식 우승은 '신화'의 서막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여자복식 금메달,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 혼합복식 우승,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 우승, 19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우승…. 한국 탁구의 전설이 된 그는, 지난달 23일 국제탁구연맹(ITTF) 명예의 전당에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현정화(42). 전화선을 타고 흘러온 그의 목소리는 초겨울 낙엽처럼 건조했다. 도하에서 열린 '피스 앤 스포츠컵' 대회를 마치고 막 귀국한 길이었다. 인터뷰 요청을 반기지도 않았다. "국가대표 선발전 때문에 내일 바로 영주 내려가야 하는데요."

시차 적응할 겨를도 없이 현정화는 바빴다. 대한탁구협회 전무로 '살림'을 도맡고 있고, 한국마사회 탁구단 감독으로, 국가대표 여자팀 감독으로 분초를 쪼개 뛰고 있는 셈이다. 영화 제작 현장에도 간다. 91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으로 여자단체전 우승을 이끈 '감동의 46일'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피 말릴 듯 팽팽한 긴장감이 좋다


현정화는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져도, 이겨도 무덤덤하다. 오로지 ‘파이팅!’만이 강렬했다. “기를 뺏기지 않으려고요. 아무리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타이밍을 절묘하게 빼앗아오면 단박에 승기를 잡을 수 있어요. 그걸 잡기 위해, 그리고 나의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파이팅을 외치는 거죠.” 그래서인가. 현정화의 승리는 대부분 ‘역전’이었다. 그 치열한 승부사 기질이 그녀를 국민 스타로 만들었다.

―거의 다 지게 된 경기를 다시 뒤집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 아닐 텐데.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이 늘 있었다. 그건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력의 싸움이지. 아무리 격차가 벌어져도 집중력을 살리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보는 사람은 숨이 막힌다.

“나도 막힌다.(웃음) 하지만 한점 한점 쫓아 올라갈 때의 그 느낌이 좋다. 그 쫀쫀함, 피 말릴 듯 팽팽한 긴장감이 좋다. 이른 아침, 빈속에 커피 한잔 들어가면 찌르르해지는 느낌, 경기장 들어설 때 머리털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정말 좋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밥 먹고 난 뒤의 나른함이다. 긴장이 없으면 사는 것 같지가 않다.”

―라켓 던지고 도망가고 싶은 때는 없나.

“도망가고 싶지. 그런데 포기하면 지는 거니까. 스포츠가 삶인 선수들에겐 승리가 목적이고 생명이니까.”

―현정화의 금메달은 기술보다 승부근성이라는 말이 있더라.

“지면 분해서 속에 불이 났다.(웃음)”

―그러면 친구들이 없지 않나.

“경기할 때만 독하다. 친구 많다.(웃음) 먼저 마음을 열고 배려하는 편이다.”

―독하게 훈련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스포츠는 자기가 투자한 시간만큼, 땀 흘리고 연습한 만큼 실력이 나온다. 진리다. 더 나오지도, 덜 나오지도 않고 딱 그만큼만 나온다. 발바닥에 물집을 달고 살았다. 우리 때만 해도 고무매트가 아니고 마룻바닥에서 훈련하고 시합했다. 발바닥에 불이 난다. 물집이 잡히면 바늘로 터뜨린 뒤 실을 끼워넣었다. 물집이 터져도 물이 남아 있으면 계속 옆으로 번지니까 실을 넣어 물을 빨아들이는 거다. 터진 물집이 서로 밀려 쓰라린 상태로 계속 연습한다. 몸살이 나도 오늘 하루 연습 쉬고 싶다는 말을 못했다. 1시간만 더 자면 나을 것 같은데 입 밖으로 그 말이 안 나온다. 스포츠의 세계에 타협이란 없다. 독해야 살아남는다. 1등은 한 사람이니까. 밟고 밟고 밟아서 나 스스로 서야 했다.”

―훈련시간이 동료선수들에 비해 길었던 건가.

“남보다 10분 먼저 연습하고 10분 더 남아 연습했을 뿐, 무조건 오래하지는 않았다. 특히 집중력 키우는 훈련을 많이 했다. 공만 보는 훈련을 죽어라고 했다.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볼과 상대의 라켓만 본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공과 라켓과 내 몸이 하나 되는 순간이 온다. 신들린 듯 공을 치게 된다.”

◇엄마를 위해 탁구공을 잡았다

―부산상고 탁구선수였던 아버지 영향도 컸겠다.

“아버지는 늘 아프셨다. 폐가 안 좋아서 자리를 보전하시다 중2 때 돌아가셨다. 가끔 경기장에 오셔서 응원해주신 기억, 훈련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아이스크림 주시면서 ‘이걸 먹어야 피로가 빨리 풀린다’ 하시던 기억…. 내가 국가대표 되는 거 못 보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둘째 딸이 탁구 하는 걸 엄청 반대하셨다.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니었고, 운동하면 배고프게 산다고 해서. 영국 세계주니어오픈에서 4관왕 따 가지고 오니까 포기하시더라.(웃음) 그런데 나는 엄마를 위해 탁구했다. 생계를 이어가시느라 엄마는 늘 집에 없었다. 큰 회사의 조리사로 취직해 매일 새벽 출근하시고 밤늦게 퇴근하시면서도 세 딸의 도시락, 간식 챙기는 걸 잊지 않으셨다. 일요일 아침이 제일 좋았다. 훈련이 없으니 늦잠을 자고 있으면, 엄마가 부엌에서 달그닥거리며 밥하는 소리가 참 좋았다. 일요일 오후엔 다 같이 때 밀러 목욕탕 가고, 집에 돌아올 때 요구르트 사먹고…. 나는 엄마가 낮잠 자는 걸 본 적이 없다. 엄마를 위해 성공하고, 엄마를 위해 1등 하자 다짐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가 현정화의 전성기였다. 그 시절이 그립지 않나.

“난 시합에서 이기든 지든 빨리 잊는 편이다. 한 달 뒤 또 시합이 있으니까 거기 도취돼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합은 그날로 끝나는 거다. 다음 시합을 위해 준비를 해야지, 승리의 순간을 회상하는 건 시간 낭비다.”

―88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뒤에는 요즘의 김연아만큼 인기가 많았다. 화장품 모델까지 했다.

“팬레터가 2~3일에 1000통씩 왔다. 방에 인형을 깔아놓고 살았다. 죄다 여고생 팬이었지. 화장품 모델도 즐거운 추억이다. 2시간 동안 덕지덕지 신부화장한 뒤 카메라 앞에 섰는데 고상하게 웃으라고까지 해서 엄청 애먹었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뭘까.

“88올림픽, 91년 지바, 93년 예테보리에서 단식으로 세계선수권 우승했을 때.”

―단상에 서서 태극기 올라가는 모습 보면서 무슨 생각 하나.

“내가 한국인이구나 하는 생각. 이상한 게, 내가 우승해서 태극기가 올라갈 때는 눈물이 안 나는데, 남들이 메달 따서 태극기가 올라가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웃음)”


한국마사회 탁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현정화. 시합을 이틀 앞둔 선수들에게 그는 서브와 리시브 훈련에만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모든 경기의 기본이니까요. 감(感)을 잃지 않는 것, 경기와 인생 모두에서 중요합니다.”

―대통령들 축전도 무수히 받았겠다.

“전두환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다. 선수 입장에선 전두환 대통령이 아쌀해서 좋았다. 지원과 격려를 팍팍 해주시니.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로 식사 초대를 두 번이나 하셨는데 두 번 다 칼국수를 주셔서 무지 실망했다. 국제대회 나가 싸우고 돌아온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뭔가.(웃음)”

―가슴 쓰라렸던 경기도 있겠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중국 덩야핑에게 단식도 지고 복식도 졌다. 동메달 2개 따서 돌아왔는데 국민 반응이 냉담하더라. 사실 동메달도 잘한 거 아닌가.(웃음) 너무 메달에만 연연했다. 오로지 따고 싶은 생각. 그걸 벗어야 플레이가 잘되는데, 신들린 듯 칠 수 있는데.”

―결국 덩야핑에겐 한 번도 못 이긴 건가.

“단식에서는…. 그녀의 기가 엄청 세다. 늘 만나면 불꽃이 튀지. ‘아, 세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웃음)”.

◇양영자 없으면 현정화도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덩야핑에게 패한 뒤 ‘현정화의 시대는 갔다’는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슬럼프였다. 극복했다기보다는 탁구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꾼 계기가 됐다. 전에는 꼭 1등을 해야 하고, 1등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패하고 좌절한 내 모습까지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더라. 승리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선수,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인가, 이듬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여자단식 금메달을 따냈다.

“나는 박태환 선수의 슬럼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극복했으니 정말 훌륭한 선수고. 남자선수들은 여자와 달리 슬럼프를 극복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김연아 선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박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충분히, 누구도 안겨주지 않았던 행복과 즐거움을 국민에게 선사하지 않았나. 김연아 정도면 IOC 위원에도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뒤 94년 은퇴했다. 너무 빠르지 않았나.

“돈이 됐으면 계속 했을 거다.(웃음) 훈련 없이 1등 할 수 없고, 훈련 없이 1등 하는 걸 받아들일 수도 없는 성격이라 스스로 힘들었다. 좋은 선수로 기억될 때 은퇴하고 싶었다.”

―영광의 시절이 길었던 만큼 후유증이 컸겠다.

“훈련 안 해도 되니 아침에 더 자도 되는데, 새벽 6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어이가 없어 영어학원 새벽반을 신청했지.(웃음) 6개월은 허공을 걷는 듯,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더라. 대학원 공부를 했지만 육체적으로 고통이 없으니 우울감이 지속됐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다시 바빠졌고, 자연스럽게 치유됐다.”

―현정화의 멘토는 누구인가.

“고등학교 때 탁구선생님. 기술보다도 사람됨을 가르치셨다. 중3 때 국가대표 코치로 만난 이에리사 촌장님도 잊을 수 없다. 내 전형을 전진속공형으로 바꿔준 분이다. 양영자 선배도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어주셨지. 양영자가 없다면 현정화도 없다. 언니는 볼이 찍찍 깔리는 중진 드라이브형, 나는 볼이 팽팽 회전하는 전진속공형이라 웬만한 남자선수들도 이기는 환상의 복식조였다. 몽골에서 선교사로 일하는데, 몇 해 전 서울 오셔서는 내가 살이 너무 빠졌다고 걱정하더라. 따뜻한 선배다.”

―현정화의 ‘한 성깔’을 보여준 것이 2007년 대한탁구협회의 감독권한 침해에 반발, 유남규와 국가대표 감독직을 동반사퇴한 사건이다.

“좋지 않은 기억이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계속 굴러가면 독이 될 뿐이다.”

―지금은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로 간부가 된 입장이다.

“감독은 권한을 최대한 발휘하고, 대신 책임을 철저히 지면 된다. 탁구협회는 한국 탁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조직이다. 개인의 이익, 자기 팀의 이익을 내세우면 안 된다.”



◇찬스볼이 찬스볼이 아니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의견을 구하는 사람이 있나.

“대개는 나 스스로 한다. 부모님, 선생님들, 선배들에게 잘 배운 덕이다.”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 ‘코리아’로 결승전에 오른 현정화(오른쪽)와 이분희. 세계 최강 중국을 꺾고 우승했던 46일 감동의 드라마가 현재 영화로 제작 중이다. / 조선일보사
―동료 탁구선수였던 남편(김석만)도 의지가 될 것 같다.

“조언을 구하면 언제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 대답을 해준다. 국가대표 감독 사퇴할 때에도 ‘네 뜻대로 하라’고 했다. 반대해도 내 결심 바꾸지 못할 걸 아니까.(웃음)”

―어떻게 만났나.

“스무살 때. 태릉선수촌에서 연습 파트너를 많이 해줬다. 연애 10년 한 뒤 결혼했는데, 훈련하고 시합 나가느라 남들 1년 연애한 것만큼도 데이트를 못했다.”

―대중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어떤 점이 좋았나.

“무뚝뚝한데 나한테만 잘해주는 것 같아서.(웃음) 선수생활의 어려움을 아니 많이 위로가 됐다.”

―유명한 아내를 둔 남편의 심적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

“없진 않았겠지. 표현은 안 해도. 내가 남편에게 잘하려고 노력한다. 바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늘 표현한다. 집에 있을 땐 두 아이 보살피며 아내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크게 싸울 일 없더라.”

―자상한 아빠인가.

“생활체육 지도자인데, 퇴근해 들어오면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윤선생 다했니?’ ‘바로셈은 풀었어?’다.(웃음)”

―현정화는 어떤 엄마인가.

“ 출장이 많으니 거실에 트렁크가 항상 놓여 있다. 이젠 아이들도 익숙해져서 내가 짐 싸고 있으면 ‘또 어디 가? 잘 갔다 와’ 한다.(웃음) 교육은 엄격한 편이다. 거짓말하거나 자기 할 일 안 했을 땐 회초리도 든다. 준비물 빠뜨리고 가면 절대 갖다주지 않는다. 선생님께 혼나고 와야 정신을 차리니까.”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원하는가.

“타인과 사회에 도움을 주는 사람. 내가 1등만 바라보며 성적 위주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안다. 1등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로운 삶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말술’이라더라.

“그런 말이 돌았나? 소주 2병 정도. 술이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을 줄여줘서 좋다.”

―체구에 비해 대식가라고 들었다.

“개고기도 먹는다. 체력을 위해 먹기 시작했다가 맛을 알았지.(웃음) 다음날 아침 얼굴에 기름이 좍 흐르는 게, 확실히 덜 지치는 것 같다.”



29일 현정화 감독이 국제탁구연맹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독종선수였던 현정화는 독종지도자인가.

“그래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선수들 고충을 너무 잘 아니까 배려가 먼저 된다. 좀 힘들게 시켰다 싶으면 회식하러 가고 영화 보여주고.(웃음) 다만 경기를 쉽게 포기하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탁구가 네 인생인데, 그렇게 쉽게 보여? 하지 마!’ 한다.”

―탁구와 인생은 어떻게 닮았나.

“찬스볼이 찬스볼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뜬 공이라 강스매시할 절호의 기회 같은데 거기 함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 찬스볼일수록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선수들에게 공을 절대 함부로 치지 말라고 가르친다. 공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기회는 인생에 세 번밖에 오지 않고, 그걸 잡으려면 우리는 늘 준비돼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