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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놀이가 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생각

주인의식 vs 종업원 의식

주인의식 vs. 종업원 의식
황인원 문학경영연구원 대표
詩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10편>


“어떤 직장을 다니든 여러분이 한낱 고용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은 바로 당신 자신과 일하는 하나의 회사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커리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독 경영자로서의 여러분만이 그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커리어에서 매일 수백만의 개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인텔사 CEO였던 앤디 그로브(Andy Grove)의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졸업식 축사 중의 한 대목이다. 회사 생활에서의 주인의식을 강조한 말이다. 직장인이라면 귀가 따갑게 들었을 내용이다. ‘이 회사의 사장이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라’ ‘주인의식이 업무 수행의 문제점은 물론 생산성을 저해하는 요인을 보게 하고, 그 해결할 방법까지도 찾게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당신의 업무 수행 능력은 한 단계 상승하게 된다’는 등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 직장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주인의식’이라는 말을 그토록 많이 들었는데 왜 변하지 않는 것일까. 왜 계속 종업원의식으로 일을 하는 것일까.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김 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돈 500만원으로 쪽방 하나를 얻어 시작한 기업이 지금은 1천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됐다. 이렇듯 자수성가한 김 사장 역시 직원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회사를 내 것으로 여겨라’다. 하지만 아무리 김 사장이 ‘주인의식’을 강조해도 직원들은 들을 때만 ‘네’라고 대답하지 좀체 행동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혼자 화가 나서 애꿎은 담배만 연거푸 태우곤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김 사장이 입버릇처럼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사장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말이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직원이 주인의식을 갖게 하는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직원에게 사장이 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틀린 것이다. 어떻게 사원이 사장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것은 정말 사장이지 사원이 아니다.

직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식

왜 그런지 보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리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자리 개념은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보이는 자리’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자리’다. 보이는 자리는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이사, 부장, 과장, 사원 등의 자리다. 즉 직장에서 주어지는 직급에 의한 자리다. 그래서 사장은 사장 자리에 앉고, 과장은 과장 자리에 앉는다. ‘보이는 자리’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사장 자리에 앉게 되면, 그 사람의 의식은 사장이 된다. 마찬가지로 과장 자리에 앉으면 과장이 된다. 또 대리나 사원의 자리에 앉으면 그에 맞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자리는 의식의 공간이다. 이때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 자리’다.
의식의 공간인 자리에는 무엇이 있나. 정신이다. 정신은 들고 난다. ‘정신 나가다’ ‘정신 들다’ ‘정신 있다’ ‘정신없다’ ‘정신 빠지다’ ‘정신 차리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을 보면 정신은 있다가도 없고, 빠졌다가도 다시 찬다. 움직임이다. 움직임에는 공간이 필요하다. 정신이 드나드는 공간이 바로 의식의 공간이다.

정신이 사장의 의식 공간에 있으면 그 사람은 모든 말과 행동을 사장으로서 하게 된다. 당연히 정신이 과장이라는 의식의 공간에 있으면 과장 자리에 맞는 행동과 말을 한다. 그래서 ‘정신 차린다’는 말은 자신의 의식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장이 부장이나 사원이 하는 일까지 간섭하고 참견하면 사장 자리의 힘이 사라진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사장의 의식 공간으로 자신을 몰입시켜 부하 직원이 하는 일을 버리고 진정 사장이 해야 할 일을 하면 자리의 힘이 생긴다. 이 자리의 힘이 권위다.
이것이 주인의식이다. 그러니까 대리나 과장이 사장의 행동과 말을 하는 게 주인의식이 아닌 것이다. 주인의식은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그 자리가 갖는 힘에 온 정신을 몰입하는 상태다. 그래서 사장은 사장대로, 그 외 직원은 각각 직급에 맞게 그 자리의 힘을 발휘하는 게 주인의식이다.

자리에 대한 의식과 권위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자리는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장이라도 만년 사장이 아니다. 언젠가는 물러간다. 창업자도 스스로 물러나든 죽어서 물러나든 바뀌게 된다. 모든 직급이 그러하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바뀌는 것은 움직임이다.
‘경영의 달인’ ‘세기의 경영인’이라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칭송받던 GE의 전 회장 잭 월치도 2001년 9월 45세의 이멜트(Jeffrey R. Immelt)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리에서 떠났다. 정신이 드나드는 ‘보이지 않는 자리’는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아니겠는가.

그러니 사장이라는 직함을 사장이라는 공간의 자리와 하나로 보는 시각은 잘못이다. 자리의 힘, 즉 권위는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자리의 공간에서 나온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자리의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 권위이니 권위는 사장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사원 역시 권위가 있다. 사원이 자신의 의식공간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자리의 힘을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다. 그 쓰임이 사장과 기능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원의 권위가 발휘되는 사우스웨스트항공

사원이 자리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하게 되면 주인의식은 저절로 생긴다. 특히 고객 접점에 근무하는 사원의 권위는 회사 이미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때 사원이 고객을 섬기는 태도로 일하는 것은 사원 자리의 주인일 때 나오는 자리의 힘 즉 권위의 힘이다.

이런 주인의식을 가장 잘 드러낸 기업이 사우스웨스트항공이다. 이 항공사 직원들은 자신의 권위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 탑승 담당 직원은 승객 중 한 사람이 개를 데리고 휴가를 떠나기 위해 공항에 왔다가 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자 이 직원은 개 주인이 휴가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도록 2주 동안 개를 돌봐주었다. 어떤 직원은 노인이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다음 기착지까지 그 승객과 함께 동행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 직원을 꾸짖는 상사가 없다. 직원 직분에 맞는 권위를 행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직원은 모두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의 힘을 활용해 권위를 세운 것이다. 그러니 직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상사라도 이 권위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최고의 회사가 되려면 직원들의 정신이 자신의 의식공간에 있도록 부추겨, 필요한 만큼 자리의 힘을 쓸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직원 스스로가 윗사람에게 의지하는 습관을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문제를 능동적으로 찾아 해결하는 주인의식 발현이 된다. 이럴 때 그 회사 조직은 탄탄하게 된다.

어디 탄탄한 조직 세우기뿐이겠는가. 직원과 대화를 해도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이 가능해진다. 직원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하는 대화에서 소통 원활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 이것이다.

사장과 직원의 의식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전제조건이 있다. 먼저 자신의 의식공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사장이 사장 자리에 의식 공간에 있지 않고, 직원들이 앉는 자리에 의식 공간이 있다면 직원들의 일을 간섭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직원이 가져야 하는 권한의 힘은 없어진다. 주인의식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식공간부터 찾고, 그 다음 직원들의 의식공간을 들여다볼 때 스스로가 소통의 장을 만들 수 있고, 직원은 자신의 자리에 충실한 주인의식의 발현이 가능하게 된다.

내가 써 놓은 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암호를 입력하시오’
텅 빈 케잌 상자 같은 컴퓨터 화면은
같은 말만 반복한다
새가 뇌 속으로 빨려 들어갔나!
날 받아주던 기호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랑도 그대 내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
타인의 가슴에 쓰는 일기였다
그때, 그대의 닫힌 문을 열던 암호가 무엇이었는지
그대를 내게 집중시키던
상형문자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고백할 가슴도
암호가 되어 날아가던 기쁨도 사라졌다
수백 개의 태양이 져버린 화면을 끝없이 바라본다

강신애 시인의 <암호를 잊어버렸다>라는 시다. 시인에 따르면 사랑은 그 사람의 가슴에 내 목소리를 숨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라디오를 틀듯 가끔 그 사람의 가슴을 열어 놓고, 그 사람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기가 막힌 상상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연인의 가슴에 나의 일기를 써 놓는다. 그리고 간혹 연인의 가슴을 열고 내가 쓴 일기를 펼쳐보곤 한다. 그런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나의 일기를 훔쳐볼까봐 연인의 가슴에 암호를 걸어놨다.
그러고는 어느 날 연인의 가슴에 숨긴 내 일기를 보고 싶어 연인의 가슴을 여는데 열어지지가 않는다. 자꾸 암호를 넣으라고 한다. 암호. 그동안 사용했던 여러 가지 암호를 넣어도 모두 안 된다. 암호를 잊어버린 것이다. 내 목소리가, 내 비밀 일기가 연인의 가슴 속에 있는데 암호가 없어 그 가슴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즉 연인의 가슴에 내 목소리를 넣고 의식 공간을 만들었는데 암호를 잊어버려 그 의식 공 간으로 내 정신이 접근할 수가 없다. 정신이 접근할 수 있을 때는 연인의 목소리가 곧 내 목소리이니 연인의 희로애락은 곧 나의 희로애락이었다. 연인이 슬퍼하면 그것이 내가 슬픈 것이다. 슬픔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를 내도 화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니 내가 나에게 화를 내는 꼴이었다. 그래서 화를 내는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자책하기도 했다. 연인의 감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였던 셈이다. 그래서 연인과 소통도 잘 되고, 이해심도 매우 높았다.

그런데 암호를 잊어버려 연인의 가슴이라는 의식공간에 있던 내 자리에 정신이 드나들 수 없게 되니 연인과 나는 하나의 정신으로 살지 못하게 됐다. 연인이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연인이 슬퍼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의식 공간이 연인의 가슴에 있었는데 그 의식 공간인 자리에서 정신이 이탈한 탓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와의 소통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이를 연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조직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해보자.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제대로 된 조직 세우기는 남의 얘기가 될 게 아닌가.
 

그래서 이 시는 소통 원활과 조직의 변화가 어디서 출발하는 지를 통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시에서 주인의식과 소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저 작 권 자(c)IGM 비즈니스 리뷰.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