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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풍성하게 /읽고-

난 당신이 좋아

난당신이좋아고통속에부르는아가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지은이 김병년 (IVP,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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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대면하는 하나님이 곧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귀한 책.

긴 광야의 길을 걸으며
다윗과 같은 외침과 고백을 통해 삶의 고통을 진솔되게 나누는 저자의 솔직함과 용기가
내 마음에 애통함이 되기도하고, 감탄이 되기도 했으며, 감사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어떤상황에서, 어느정도까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고통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붙잡으며 인내를 가지고 스스로 부요하다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감사를 통해
"난 당신이 좋아." 라는 말처럼 단순하지만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참되고 의미심장한 그런 고백을 하고 싶다.



# 그동안 우리는 결혼기념일마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아홉 번이나 주고 받은 선물들은 모두 아름답고 귀하고 예쁜 것들이었다. 그런데 열번째 받은 선물은 내가 준비한 것도, 아내가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이 선물은 오직 받은 사람이 가꾸어야만 아름다워지고, 받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길 때에만 더욱 풍성해지는 미완의 선물이었다. 받고 싶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선물,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형편없는 선물이지만 사랑을 연단하는 귀중한 선물. 그건 바로 아내의 연약함이라는 선물이었다.


# 나는 경건이라는 이름을 빙자해 내 삶을 전혀 가꿀 줄 몰랐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선교하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인데 나는 그걸 몰랐다. 그러던 내가 아내를 통해서 사랑은 다른 사람을 풍성하게 채우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개인의 고유한 성품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오랫동안 나는 사랑이란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며, 그 희생이란 나의 고유한 개성마저 모두 포기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아를 상실하지 않고 자기 속에서 나오는 풍성함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나누는 것임을 아내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 아무리 변함없는 상황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변화들이 있는 법.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오직 한 가지 변화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 내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배어 있었다. 


#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있다. 바로 깨끗한 그릇이다. 하나님은 그릇의 재질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는다. 그릇의 상태를 보고 사용하신다. 신기하게도 그릇의 상태는 연단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다. 왜 속죄의 고백만으로는 깨끗하게 되지 않을까. 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성결케 되지 않는 걸까. 하나님은 왜 하필 삶이 깨지고 상해서 속병이 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을 사용하시는지 궁금하다. 


# 연약한 아내를 중심으로 우는 자들이 모인다.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은혜를 받는다. 낮아짐은 이렇듯 깊은 위로를 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경계의 빗장을 풀어 주고 쉬도록 한다. 연약한 자가 강한 자를 안아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린도후서 4:7)


# 리처드 로어(Richard Rohr)는 이렇게 말했다.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해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음은 오직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나도 내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뛰어넘어 매일, 하루, 한순간을 사랑해보려고 한다.


# 기도는 정제되고 절제된 언어보다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특히 고통중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원망과 불평, 비난과 호소를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분이 주시는 마음의 정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내가 아프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긍정이나 부정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아프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아픔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삶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아픔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왜곡된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유한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 신앙이 아닐까. 아픔, 슬픔, 불행을 외면하지 말고 그 자체로 인정해야 여기서 비롯된 원망과 불평 불만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께 쏟아낼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참된 믿음, 진정한 성숙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 겪고보니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와 함께 있어 줄 친구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다.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연약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가 버림받고 잊혔다는 고립감에 빠지지 않도록, 함께 함으로써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함께'라는 소속감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 이 땅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얻는 삶이 축복이 아니다.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축복이다.


# 고난이 닥쳐왔기에 훈련을 받는 것이지, 훈련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폴 루트니에가 말한대로, 고난을 이기는 과정이 축복이지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삶이 있을때에만 유효하다.


# 광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능력과 존귀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반면에 인간의 완악함과 교만, 불만족과 연약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광야는 이러한 두가지 실재가 벌거벗은 채 만나는 곳이다. 살아 있고 먹고 있으면서도 좀더 좋은 것을 달라고 불평하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에 때로는 분노하고 벌을 주시면서도 한결같은 은혜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만난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인간과, 죽음에 처한 인간들에게 살 길을 여느라 분주하신 하나님이 만난다. 얇은 옷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으로 최소한의 자기 보호밖에 할 수 없는 인간과, 구름으로 그늘을 만드시고 불기둥으로 한밤의 냉기를 녹이시며 사람이 거할 수 있는 최적의 온도를 넉넉하게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 만난다.


# 삶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믿음은 하나님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하게 한다.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란다.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이다. 모든 것에 주도권을 갖고 사는 한, 믿음이 자라기는 어렵다. 그저 자신의 관리 능력만 자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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