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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놀이가 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생각

좋은 삶을 위한 충분함

어떤 마을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두 남자의 비유를 들어 생각해보자. 도중에 그들은 길을 잃었지만 그래도 계속 간다. 이제 그들에게는 오로지 함께 걸어가는 옆 사람보다 앞서겠다는 목표만 남았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모든 내재적인 목적들이 소멸하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남는다. 남보다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자리 싸움이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꼭 있어야 할 곳이 없다면 남보다 앞서는 게 최선이 된다. (149p)
 
로버트 스키델스키 &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박종현 감수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중에서 (부키)
 
최근 KBS의 '인간극장'에 남태평양의 섬나라 마이크로네시아에서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는 한국인 남자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더군요. 곳곳에 있는 과일열매와 더운 날씨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적어서 그런가요, 그 곳에서는 뭐든 나누려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가장 심한 비난이 '욕심쟁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자란 그 남자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일 겁니다.
 
이 책의 저자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우리에게는 '좋은 삶'(good life)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좋은 삶' 같은 목표가 소멸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라 '누구만큼'이나 '누구보다 더 많이'라는 상대적인 목표만이 남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목표는 저자의 말대로 무한히 계속 멀어져갈 겁니다. '좋은 삶'과는 별 관계 없는 '자리싸움'(positional struggle)에만 매달려 지내기 쉽게 되겠지요.
 
'충분함'(enoughness)이라는 단어도 의미가 많이 바뀐 듯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으로는 '좋은 삶을 위한 충분함'이지만, 요즘에는 '욕구를 충복시키기에 충분함'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위한 충분함'이 진정 무엇인지 고민하며 지내야겠습니다.
 


 

 

오늘 온 예병일의 경제노트.

 

과연 좋은 삶을 위한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정답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동일한 것은 아마도 다른사람과의 비교에서부터 오는 우월함이 아닌

각자의 중심이 어디를 향해있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제 경제노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소개되어 있었다.

   -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1873)

 

"매 순간 어떤 형태가 손이나 얼굴에서 완벽하게 그려지는가 하면,
자연의 언덕이나 바다에 표현되는 느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을 끌기도 한다.
한순간 열정이나 깨달음, 지적 환희가
거부하지 못할 만큼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중요한 건 경험의 결과가 아닌, 경험 그 자체이다.
우리에겐 이 다채롭고 극적인 삶에 대해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가장 정교한 감각의 눈을 통해
모든 걸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매 순간 삶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타오르는 지점에
항상 발을 딛은 채로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이 단단하고 보석 같은 불꽃으로 언제나 활활 타오르며 이 환희를 유지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결국 삶의 행복이란

삶에서 오는 다양한 경험과 정서를 체험하고

그속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