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읊조리고 기록하고 마음에 새기다 /일상의 단편과 에세이

색깔론



"넌  니 색깔이 뭐라고 생각해?"

 

라는 팀장님의 질문에 나는 결국

 

'아직은 말씀드리기가 어렵다' 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평소, 적어도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에 있어서 내 나름대로의 철학과 가치관을 확립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나의 생각을 꿰뚫기나 한 듯 명확하게 짚으시는

질문에 그저 머슥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나의 경력이라곤 아직 채 2년이 되지 않은 풋내기이고

홀로 자그마한 모래알을 헤아리다 HR이라는 분야갸 더없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 같은 곳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 업무 스타일이나 성향도 유채색인지 무채색인지 딱히 분간이 되지 않는다.

 

같은 팀내에서 근무하고 있는 C대리는 꼼꼼하고 체계적이기로 유명하다.

보고서나 단순한 품의서 하나를 쓸때에도 큰 카테고리에서 부터 작은 카테고리로

분류체계를 나누어 그의 손에 어떠한 자료든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구분이 된다.

게다가 차분한 성격에다가 온화한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그에게 더욱 신뢰감을 안겨준다.

  

K대리가 회식자리나 대화자리에 없으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어설픈 서울말과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있는 억양에는 웬지모를 친근함이 느껴진다.

유쾌한 표정과 억양으로 자칫 무거워질수 있는 대화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의 탁월한 능력이다.

 

P대리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줄줄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오감을 다해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그의 모습은,

사내에서 건조하고 매말라있는 나에게 늘 반성을 안겨준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마음 한구석에 박하사탕을 품은 것 처럼 시원한 허브향이 느껴지는 것 같다.

 

J주임과 일을하면 늘 새로운 도전을 받는다. 자기주도적이고 섬세한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정례화하고 개선하는데 큰 역량을 가지고 있다. 늘 새로운것을 고민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주변사람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된다.

 

그에 반해 나는 어떠한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지만, 특별히 내세울것이 없어 보인다.

 

회식을 할때도 그저 남들이 좋아하는 기호에 한표를 던지는 군중속의 익명을 추구하는 편이며,

친한 친구들이랑 함께 있으면 어지간하면 다수가 원하는 대로 좇아가는 편이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럭저럭 맞출줄도 알고,

다른사람이 요구하면 요구하는 대로 기호에 맞춰줄 줄은 알지만, 

정작 그 안에 나의 사고와 가치관은  물을 잔뜩 섞은 수채화처럼 흐려진다.   

 

이 세상 사람들이 화려한 색깔로 도배되어 있는 각각의 스케치북 장이라면

나는 맨뒤에 남은 하얀 도화지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하얀색 도화지 이고 싶다.

 

어느 누구든 그 위에 멋진 붓으로 그리면 있는 그대로 보여질 수 있는 하얀색 바탕을 갖고 싶다.

어느 그림이나 풍경에 기가막히게 들어가서 다양한 느낌을 연출해 내는 하얀색이고 싶다.  

어느 색깔이든 그 색깔의 농도와 채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하얀색이고 싶다.

어느 그림이든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하얀색의 사람이고 싶다.



- 2010년 10월에 쓴 글. 
 당시 HRM 2년차로서 한참 바쁠 시기,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때 였던 것 같다. 

 새로운 행로에 접어든 이 시점,
 이제서야 붓을 들어, 내 도화지에 내 나름의 색깔을 입히고자 한다.

조심스럽게 정갈하고 예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기 보단,
조금 투박하고 볼품없어 보일진 몰라도 어울릴것 같지 않은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여
피카소와 같은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