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읊조리고 기록하고 마음에 새기다 /일상의 단편과 에세이

아레테(Arete)를 꿈꾸며


   내 나이 여느 또래와 비교해보았을 때에도 뒤쳐지지 않는 수준의 연봉, 이제 막 횟수로 4년차에 들어서면서 조금은 익숙해진 업무와 이제 내게 슬슬 귀찮을 일들을 도맡아 해주는 후배들,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따라 나에게 보내지는 부러움 섞인 시선들이러한 것들을 뒤로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그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소명으로 삼던 일을 하고 있었고, 팀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시기도 적당하게 대리로 승진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던, 올해 1월 이었다.

올해 나이 서른하나, 세상은 이야기한다. 이제 직장에서 좀 자리 잡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딱 좋을 나이라고. 그렇지만 서른 하나인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세상이 보내는 관점에 반항이라도 하듯, 힘들게 들어간 직장을 버리고 학생이 되었을까?

우선, 스스로에게 던진 근본적인 질문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결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부터 오는 것이었다. 여행의 행복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설레임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공연에서 느끼는 행복은 공연이 끝난 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멋진 무대를 만들어보겠다는 열정과 소망으로부터 오는 것일 게다. 학습도 이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축적하여 얻어낸 높은 시험점수와 좋은 스펙에서 즐거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원리를 깨달아 내가 그 안에서 능동적인 자유를 얻었을 때, ‘stage of generalization’ 의 상태가 되었을 때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난 어쩌면 엔트로피(entropy)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수용의 관점에서 점점 멀어진 채, 내가 속해 있는 이 조직의 문화가 아닌 다른 것은 이질적으로 받아들이고 다른것이 아니라 틀린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타인들은 그 안에서 동일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찌보면 조직문화라는 미명아래 일어나고 있는 엔트로피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이러한 엔트로피 현상에 맞선 네겐트로피(negentropy)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 욕구에 생명을 부여하고 다양한 사고를 약동시키는 활동. 엔트로피에 맞선 이러한 네겐트로피의 활동, 그것을 통한 새로운 ’.  이것이 공간을 시간화 시키는 역량이요, 아레테(Arete)추구를 통한 행복 찾기의 첫걸음이 아닌가 한다.

이라는 것은, 단편적으로 알고자 하는 한 개체만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미시적 이해요, 단지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것 일터다양한 방면의 거시적인 접근이 이루어져, 그것이 몸과 마음에 체득이 되어야 비로소 '지혜'로 존재하는 것일 게다. 그러한 지혜가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는 상태, 그러한 상태가 아레테(Arete)’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학원의 첫 학기를 시작하는 지금, 나는 온전한 아레테를 꿈꾼다. 보지 못하고 가지고 있지 못하여 단지 공격을 통해 심적으로 위안했던 공포의 상태를 벗어나 앎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고민하는 두려움으로 가길 기대한다. 반복되는 두려움과 치열한 고민을 통해 전문성의 발휘가 최고조에 올라가게 되는 경지를 꿈꾸어본다. 그곳에, 바로 내가 원하던 행복이 존재하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